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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박사/연구노트

0에서 1로 가는길 (박사과정 4년차에 접어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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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크게 힘들었을때 블로그에 스탠포드에서의 박사 과정 경험을 기록하시는 민아님이 본인의 슬럼프 시절 경험 일기를 읽으며 위로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다들 각기 다른 경험을 하겠지만 제가 겪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박사과정동안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수준의 고난일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때 이 우울감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벗어났는지 적기로 다짐했습니다. 저에게 득이 되는 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최근에 겪었던 실패나 실망속에서 배우고 깨달았던 것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4년차에 접어들면서>

박사과정 4년차가 되었다. 누군가 곧 졸업하네~ 하고 말해서 나 아직 많이 남았어~ 하고 대답했더니 적어도 시작보다 끝에 더 가까운 시기라고 했다. 박사과정의 중반을 지나오면서 지금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있었는데, 논문이 나오면 이런 힘들었던 일이 있었지만 다 극복하고 논문이 나왔습니다!!! 하고 멋지게 공유하려고 했지만, 논문은 나오려면 멀었고 이러다간 졸업 시점에 글을 쓰게 될 것 같아서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이건 올해 7월부터 10월까지 박사과정 4년차에 접어들면서 배우고 깨닫게 되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Late year anxiety>


7월쯤 즐겨하던 phd simulator 라는 게임이 있다. 매달 어떤 일에 집중할지에 대한 나의 순간 순간의 선택에 엄청난 랜덤성이 더해져서 내 졸업 시기가 결정되는 하이퍼 리얼리즘 게임이다. 그때 나왔던 late year anxiety 라는 단어가 내 기분을 너무 잘 설명하는 것 같아서 입에 달고살았다.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큰 실적이 없는거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내가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머리로는 알았는데도 한번 찾아온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7월 즈음부터 최근까지 힘든 시간들은 종종 찾아왔다. 연구가 막히거나 크고 작은일로 스트레스를 받을때 평소처럼 툭툭 털어낼 수가 없었고 울거나 우울한 기분에 쉽게 휩싸였다. 원래 내 야심찬 계획대로라면 4년차 때쯤 부터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일년에도 여러편씩 논문을 찍어내는 고수가(!) 되어있었어야 하는데, 4년차의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 말도안되게 높은 기준과 목표를 세우고 달리기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내가 컨트롤 하기 힘든 몇가지 상황들에 놓이게 된 이유도 있었다.

<발단- 멘토의 부재>

지도교수가 안식년을 떠났다. 사실 따지자면 이전에 비해 크게 나빠진건 아니었다. 논문 데드라인 직전이나 리뷰 의견을 받은 이후가 아니면 내가 쓴 글에 대한 피드백은 받아본적이 없다. 개인 연구 미팅은 취소되거나 미뤄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원래 일주일에 한시간씩이던 미팅시간은 30분으로 줄은지 오래였고 그 시간 마저도 올해들어서는 2-3명이 나눠쓰기 시작했다. 만나서 얘기할 수만 있으면 최고의 지도를 해주는 사람인데 바빠서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지도교수님도 이런 상황을 애초에 예상하고 원하면 다른 학교나 기관에 방문해서 연구하는 것도 자유롭게 하라고 한 학기 전부터 말했지만 나는 일단 벌려놓은 연구들을 끝내는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지 못했다.

<전개- 병렬로 진행된 세개의 프로젝트>

세개의 프로젝트를 한번에 진행했던건 애초에 여러 일을 벌리기 좋아하는 내 성향 탓도 있다. 새로운 주제에 대한 아이디에이션을 하는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연구 욕심도 많다보니 연구 주제가 어느새 3개가 됐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교수님으로부터 피드백을 제때 못받는 때문도 있었다. 혼자 일을 진행시키다가 이제 정말 뭘해야할지 모르겠을때 미팅을 잡으려면 보통 1-2주씩 기다려야하니 그동안 할 다른 일들이 계속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여러개의 프로젝트를 한번에 진행시키는건 정신 건강에도 좋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데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개에 집중하는 것 보다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고 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그러던 중 세 개 프로젝트가 다 막혀버렸다. 여름동안에는 캠브릿지에 공동연구하던 교수랑 일주일에 한 시간반 씩 미팅을 했었는데 학기가 시작하면서 잠수를 타버리면서 주기적으로 얘기할 사람이 아에 없어져 버렸다. 그 교수가 잠수를 타기 시작한 무렵 나는 연구의 긴 호흡에 지치기 시작했고 중간 성과를 보고 싶었다. 아직 실험 결과가 없었기 때문에 저널 퍼블리케이션까지는 멀었지만 formulation 과 theorem 이 있었고, 그 자체의 novelty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학회 2곳, ITSC 와 TRB 에 냈다. 교수 두분의 동의는 구했지만 물론 원고 자체에는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절정-막다른길>

진행중인 연구 세개가 전부 막다른길에 봉착했는데 즉각적인 지도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점점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미팅을 계속 요청하고 원고 리뷰에 대한 리마인더를 계속 보냈지만 회신은 잘 오지 않았다.

친구랑 하던 농담 내지는 유행어. Could you send me reminders to remind you?

가장 진행이 많이 된 한 연구는 실험 중에 있었는데 딥러닝 방법론을 쓰게되면서 연구실 서버 성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한번의 실험 세트를 돌리는데 일주일이 걸렸고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제대로된 hyperparameter search 을 해야하는데 실험이 너무 늘어지는 것 같았다. 확인해본 결과 70% 이상의 연산 시간이 back propagation 과정이었고 gpu 로 대폭 줄일 수 있는 상황이라 지도 교수님께 클라우드 컴퓨팅을 위한 돈을 지원해줄 수 있나 물었더니 그랜트 프로포절 정보를 보내줬다. 돈을 알아서 따서 쓰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교내 그랜트라서 훨씬 따기 수월한 기회였고, 그런 정보를 알려준 것 자체에 감사한 마음도 컸고, 프로포절을 쓰는 기회를 가져보고 싶었기 때문에 얼른 이틀만에 써서 보냈다. 그래도 그 사이에 대체로 쓸 수 있는 펀딩 소스를 제안해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어서 무력감이 심화됐다.

냈던 학회 두곳에서 차례로 리젝 메일을 받았다. 실험 결과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그런 이유로 리젝하면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제출하면서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실험 결과는 있고 이론이 없을땐 이론이 없어서 근본 연구가 아니래서 내내 정석적인 길을 팠더니 이젠 실험 결과가 없다고 뭐라하지. 둘다 있는 완벽한 연구면 저널에 냈지 학회에 안내지!

<결말- 바닥을 찍었으니 올라가자>

그간 연구 동력을 얻을만한 작은 성과들이 없진 않았다. 제출했던 그랜트가 통과되어 2만불 어치 Azure 클라우드 크레딧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연구의 다음 계획을 바탕으로 트레블 그랜트를 냈었는데 그 프로포절도 통과되어 1500불 어치 여행 경비를 받고 DTU에 방문할 수 있게 됐다. MIT 에서 진행된 워크샵의 참석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크고작은 성취들보다 오히려 나에게 더 도움이 됐던 것은 나의 마음가짐의 변화이다.

첫번째로 내가 연구에서 어떤 단계에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게 된 것이 도움이 됐다. 박사과정 진학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기간동안 연구에서 챌린지를 많이 발견했고 돌파구를 많이 찾아왔고, 마냥 이쯤 했으면 논문 한편이 나오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조급해지고 학회에라도 내서 중간 결과를 보고싶었던 것도 있다. 리젝이라는 결과 자체는 당시 정신건강에 매우 해가 되었지만 조금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ITSC 리뷰 의견은 퀄리티가 너무 떨어져서 많이 실망스러웠지만, TRB 리뷰 의견은 꽤나 퀄리티가 좋았고 어떤식으로 글을 수정하고 실험을 추가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후 조금 더 본격적으로 코딩하고 실험을 돌리면서 생각치 못했던 챌린지를 더 발견했고, 내 연구가 실제로 아직 많이 부족했구나라는걸 다시 깨달았다. 역설적이게도 아직 멀었구나 하는 현실 인식이 마음을 더 편하게 먹게 도와주고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다.

두번째로는 faculty mindset 함양이다. 지도교수가 바쁘고 내가 스스로 해야하는 이 상황을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어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예전에는 독립적인 박사과정 학생처럼 행동했다면 이제는 그냥 교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했다. 새로운 마음가짐을 먹으니 보이지 않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학생이 publication-ready 가 아닌 글을 보냈을때 얼마나 우선 순위에서 밀릴지, 반면에 재밌는 결과를 알아서 척척 결과 가져와서 디스커션만 할 수 있게 해주면 얼마나 신날지, 등등 교수들의 입장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 자체를 조금 더 독립적인 연구자로 인식하고 지도교수의 의견을 듣기 전부터 내가 알아서 내 모든 결과물에 완성도를 높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분명 내 수중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지도 교수의 인풋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보였다. 저년차때 미팅에 틀린 수식을 가져갔을 때나,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실험 결과를 가져갔을때 등등 내 모습이 생각나면서 조금 부끄러웠고, 그의 그간의 인내심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무 부족하고 멘토가 필요해서 다른 고수들한테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커서 콜라보레이터도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도 내가 알아서 컨택해야했지만 지도교수님의 인맥이 큰 도움이 됐다. 교수님이 내 연구와 관련 있는 어떤 사람의 논문이나 톡 정보를 보내주면 내가 읽어보거나 들어보고 관심이 더 생기면 컨택하는 식이었다. 총 4-5명의 코넬, mit 교수들한테 여러번 컨택 이메일도 보내보고 커피챗도 해보면서 연구적으로든 진로든 많은 조언과 힘을 받았다. 연구 관심사가 유사하고, 각자가 잘하는 영역이 확실하며, 내가 99%의 일을 하고 상대방이 1% 의 일만 하게 해주면 상대방도 공동연구를 안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컨택했던 교수들 중 몇명과는 막혀있던 몇개 주제에 대해서 같이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로 얘기가 됐다.

일을 진행 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충분한 리소스가 확보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종종 논문 성과는 너무 discrete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 하나가 나오기까지 중간과정에서 얻는 성취들이 분명 많은데 논문이 나와서 실적이 +1 되기 전까지는 0 이라는데에서 개인이 느끼는 부담감이 너무 크다. 7월달과 현재의 나를 비교해보면 여전히 실적은 0 이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리고 그건 나 스스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여전히 불안한 순간들이 찾아오겠지만 지금 깨달음을 잘 기억해서 내가 나를 믿고 continuous 한 프로그레스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우리 교수님 짱이에유

끝으로 모든 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에 완전히 내 관점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우리 지도교수님을 완전 나쁜놈처럼 썻지만 사실 엄청 좋은 사람임을 밝힌다. 너무 바쁠뿐이지 실력있는 연구자이고 인간적으로 너무 좋아한다. 납득 못하겠는 방향을 제시한 적도 한번도 없었고 입장 바꿔서 생각해봤을때 말이 안되는 행동이나 말을 한적도 한번도 없다. 내게 필요한 리소스를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해주시려고 하고 진짜 꼭 제출해야하는 무언가의 데드라인을 놓치는 경우는 못봤다. 가끔 너무 자유방임형 지도 방식이라 느끼지만 사실 내가 직접 해야하는게 애초부터 맞았기 때문에 알아서 클 수 있게 내버려둔건가, 조금 과장해서 모든것의 그의 설계였나 싶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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